Bilingual

오늘은 bilingual로서의 경험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.

나는 영어와 한국어를 할 줄 안다. 물론 세상에는 trilingual도 있고, 네 개, 다섯 개, 심지어 스무 개 언어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. 그 사람들이 정말 그 모든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지는 솔직히 의문이지만, 어쨌든 bilingual 자체가 사회에서 엄청난 성취로 인정받는 시대는 이제 아닌 것 같다. 그래도 bilingual로 살면서 내가 느낀 점들 중에,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 써보고 싶다. (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특별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. 나 또한 답답한 마음에 유튜브나 네이버 블로그에서 공감할 만한 콘텐츠를 찾아봤지만,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다.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써보자, 그런 마음에서 쓰고 싶은 것이다.)

지난 달부터 웹사이트에 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, 왜 나는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쓰는지를 생각해봤다. 첫 번째 이유는 요즘 한국어가 더 편하기 때문이다. 요즘에는 외국인 친구들도 거의 안 만나고, 한국어 수업은 외국분들과 진행하긴 하지만 내 일상을 둘러싸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다. 환경 자체가 한국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더 편해졌다.

또 두 번째 이유는, 예전에는 정신건강이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, 어떤 심리나 감정에 대한 주제들은 영어로 말하는 게 더 편했기 때문이다. 불과 5~10년 전만 해도 그런 이야기를 한국인들에게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판단받는다고 느껴졌다. 물론 외국인들이라고 나에 대한 판단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, 그래도 외국 사람들은 같은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열린 시선을 보여주었고, 좀 더 공감하는 댓글을 다는 편이었다. 그래서 영어는 나에게 감정을 공유할 때 ‘덜 판단받는 언어’처럼 느껴졌다.

근데 요즘은 한국에서도 정신건강 얘기가 더 공개적으로 다뤄지기도 하고 덜 생소한 주제가 되어서 한국어로 이런 이야기에 대해 쓰는 게 조금 더 편해졌다. 또 이 웹사이트는 대부분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찾아오는 곳인데, 초급 콘텐츠가 많다 보니 다수가 한국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초급자 분이시다. 그래서 번역기를 돌리지 않는 이상 내가 한국어로 쓰는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. 그래서 뭔가 한국어가 ‘숨을 수 있는 언어’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어로 연재를 하고 있는 것 같다. 영어로 쓰면 사람들에게 너무 그대로 다 보이고, 너무 다 이해되니까 더 드러나는 느낌인데, 한국어로 쓰면 은근히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그 적당한 거리감이 있다. 그러면서도 인터넷에 올리는 글이니까 완전히 사적인 일기와는 또 다른, 좀 더 정리된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충족된다.

참 내 심리도 복잡한 게, 그대로 다 드러나는 게 신경쓰이면 그냥 개인 일기에만 쓰면 되는데, 개인 일기에 쓰면 또 너무 아무도 안 보니까 되게 지저분한 언어가 된다.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내뱉는 느낌. 그런 글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, 나는 ‘정리된 글’을 쓰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다. 그러다 보니 약간 ‘반쯤’ 공개된 안전한 언어로 한국어를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.

bilingual로 살다 보면 어느 언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해받는 영역이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다. 한국인들만 자연스럽게 공감해줄 수 있는 감정과 생각들이 있고, 반대로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이상해 보일 수 있는 생각들이 있다. 그런 생각들은 영어권 사람들에게 더 자연스럽게 이해받는다. 그래서 어떤 말을 할 때마다 ‘이건 어느 쪽에게 말해야 오해가 덜 생길까?’ 하는 미세한 계산이 생긴다. 나는 원래 오해받는 걸 정말 싫어하는 타입이다. 매번 해명하진 않지만, 그래도 억울한 감정은 남는다. 특히 온라인에서의 오해는 더 그렇다. 그런 성향 때문에 말이나 언어에 있어서 더 민감한 것 같다.

게다가 한국어와 영어처럼 언어 구조도 다르고, 문화적 결도 완전히 다른 두 언어를 쓰고 살다 보면 종종 두 극단 사이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. 같은 내용이라도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offensive하게 들리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깊게 공감받을 때가 있다.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. 이런 경험이 쌓이면 나도 모르게 더 예민해지고, 주변 반응을 더 살피게 되고, 눈치를 보게 된다. bilingual이 되면서 더 넓은 세계를 보게 된 만큼, 동시에 더 민감하고 관찰적인 사람이 된 느낌이다.

가끔은 생각한다. 내가 영어를 잘하지 않았으면 더 행복했을까?

또 관련된 이야기로, 나의 영어 실력에 대한 반응도 한국 사람들과 영어권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다르게 갈린다. 한국 사람들은 내가 영어를 어떻게 공부했는지 얘기하면 그 노력을 알아봐주고 인정해준다. 한국인으로서 영어를 배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직접 알기 때문이다. 그런데 영어권 사람들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 반응이 좀 미지근하다. 작년에 한국어 학습자 분들에게 도움이 되라고 How I Learned English 라는 영상을 올린 적이 있다. 내가 어렸을 적부터 영어 학습을 어떻게 했는지 공유하면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. 그런데 한국어 학습자들 사이에서는 그 반응이 생각보다 냉담했고 오히려 한국인 분들에게 더 좋은 반응을 받았다. 자신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한, 약간의 micro-aggression이 느껴지는 반응들도 있었다. 솔직히 조금 속상했고 혼란스럽기도 했다.

이런 차이를 겪다 보니 bilingual이라는 게 단순히 언어 능력이 아니라, 어쩌면 정체성의 복잡함이라는 생각이 든다. 내 생각 중 어느 것을, 또는 어느 선에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고 눈치보게 된다. 그 복잡함은 때로는 장점이지만, 나 같은 사람에게는 심리적으로 조금 버거운 단점이 되기도 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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